2008년 07월 01일
::[펌]길 위의 신부, 문정현
오늘 보지도 참여 하지도 못한 시국미사를 웹에서 접하고
이글 저글 찾아다니다 발견한 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생각들을 다시 꺼내게 해준다.
주변에 계셨던, 이런 분들에게서 많은걸 느끼고, 배워야 한다.
촛불 집회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느끼는 기억들, 생각들을 잊지는 않을테다.
더 나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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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신부, 은퇴하다
"외고집으로 타협할 줄 모르며 매사에 도전적 반항적이나 신도로부터 존경받고 있으며 금전에 관심 없고 저돌적 성격으로 '깡패신부'라 불린다."1)
1990 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드러난 국군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내용이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학계, 종교계, 언론계 등의 주요 인사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찰이 이뤄졌는데 그중 한 성직자에 대해 '깡패신부'라고 부른 대목이 눈에 띈다. 매사에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신부. 바로 문정현 신부에 대한 이야기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인권운동, 1980년대 전두환 정권하에서의 민주화운동, 1990년대 이후 통일운동을 벌인 문정현 신부는 껄끄러운 인사였다. 그는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리로 나왔다. 박정희 정권은 물론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하에서도 그는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이를 바로잡고자 노구의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거리로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길 위의 신부' 또는 '거리의 신부'라고 부른다. 문정현 신부. 그가 2008년 1월 24일 전북 익산의 정신지체아 시설인 '작은 자매의 집'에서 마지막 미사와 함께 은퇴했다. 이를 두고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평생을 낮은 곳에서만 머물러온 문 신부의 삶이 지금 이 순간 더욱 우뚝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성직자의 권능이라는 허울로 이뤄지는 것들이 너무나 속악(俗惡)스 럽고 천박하기 때문이다. 성조기를 흔들며 북녘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천문학적 액수의 교회 재산을 대대손손 물려주며, 교회를 특정 정당 대선 후보의 선거대책본부로 여기는 듯한 언동 등 하나하나 열거하려면 숨이 차다.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들의 시신을 지키려다 무릎 연골이 파열돼 5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문 신부는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수십 년 동안 거리를 떠돌았던 칠순의 노사제를 위해 우리 사회가 할 일은 분명하다. 그가 또 다시 나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의와 평화가 이 땅 곳곳에 넘쳐흐르도록 모두가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한다. 문 신부는 이제 편히 쉴 충분한 자격이 있다. 신부님, 우리들의 문정현 신부님."2)
표적 맞추기 놀이
문 정현은 1940년 8월 전북 익산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조선 말기부터 5대에 걸쳐 가톨릭을 믿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세례 성사를 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7남매 중 신부 2명(문정현·문규현)과 수녀 1명(문현옥) 등 성직자 3명을 배출한 것은 이런 집안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또 문정현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로부터 큰 유산을 물려받는다. 그는 '낮은 곳'을 지켜온 동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난 부모의 유산이라고 본다. 부모를 통해서 받은 그 신앙이지. 나뿐 아니라 우리 형제들이 부모로부터 땅 한 평 받은 건 없지만 머리털 나기 전부터 아버지 어머니 모두 다 시골에서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봐왔지. 예를 들면 어머니는 늘 없이 사는 형편에도 양식을 만들어서 '어느 집 솥 안에 넣어놓고 와라'고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또 스케이트를 만들겠다고 남의 대나무를 잘라왔더니 아버지가 불호령을 내려서 다시 용서를 빌러 가기도 했다. 이런 무수한 일들이 굉장히 큰 유산이 됐다."3)
그러나 문정현은 어린 시절 큰 상처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직 초등학생이던 때에 일어났고, 바로 미군들에 의한 것이었다.
" 인민군이 물러간 동네 초등학교에 미군이 들어왔어. 아이들은 어설픈 발음으로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며 몰려들었고, 그 행렬에 나도 끼었었지. 미군 병사 두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던 나를 불렀어. 뒷산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라고. 나는 초콜릿을 더 많이 주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근데 그 죽일 놈들이 내 머리 위에 깡통을 얹어놓고 '표적 맞추기' 놀이를 하잖아. 생각해봐.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그 미친 미군 놈들이 부들부들 떠는 내 광경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잖아. 짐승들이야. 그런 놈들이니까 이라크에서 여군까지도 성고문을 하지. 내가 미군 부대에서 미군을 보면 그때의 상처들이 내 무의식 안에서 반사적으로 분노로 표출되는 것 같아."4)
어린 문정현의 머리 위에 깡통을 올려놓고 사격을 했던 미군들의 표적 맞추기 놀이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았던 기억은 문정현에게 상처로 남았고, 그것은 후일 통일운동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문정현은 황등국민학교와 이리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인 서울 성신고에 진학했다. 부모님의 권유였다. 이 시절 그는 농민운동과 노동자운동을 벌이게 되는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 고등학교 과정인 소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본, 제목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 편의 영화가 나를 몹시도 괴롭힙니다. 사제가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일을 하면서 당하는 고통을 그린 영화인데, 어쩌면 그 영화가 나의 사제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5)
거리로 나서다
가 톨릭대를 졸업한 문정현은 1966년 12월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된다. 전주 교구청에서 성직자의 길을 조용히 걷고 있던 그가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1974년의 일이었다. 유신독재의 칼바람이 불고 있던 때, 그는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1974년 4월 볼일이 있어 서울 대교구청에 갔다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러 온 아주머니들을 보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하기만 한 그들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가족이었고, 그들로부터 앞뒤 사정을 소상하게 들은 결과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이 부도덕한 독재정권을 지키기 위해 꾸며낸 것이었음을 알게 됐지요."6)
이 후 문정현은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주장하고 관련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의 관련자들은 사형선고 후 20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다. 희대의 사법살인이었다. 문정현은 분노했고 곧 사형당한 이들의 주검이 화형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는 장의차 속으로 들어가 누워 화장터로 가는 시신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장의차를 떼 매고 가려는 크레인 위로 올라가 저항하다가 경찰이 끌어내리는 바람에 아스팔트로 떨어져 무릎 연골이 파열되었고, 이 일로 그는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된다. 후일 문정현은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자신을 거리로 나서게 한 것이 인혁당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인혁당 사건이야. 그 가족들을 만난 뒤로 억압받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한다고 다짐했지. 가난하고 억울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사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어. 난 그 역할에 충실할 뿐이고 그것이 나의 신앙인 셈이지."7)
평 범했던 사제를, 다만 억울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제를, 박정희 정권은 투사로 만들었다. 문정현은 인혁당 사건 이후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정권의 감시와 탄압도 심해졌다. 그리고 1976년 3월 2일 문정현은 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 사건)에 연루되어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등과 함께 구속돼 1977년 12월 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한 획을 긋는 경험을 하게 된다.
" 감옥은 많은 책을 정독할 수 있는 곳이다. 내 평생에 가장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1년 정도라면 징역살이를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는 '배부른'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 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분도출판사에서 1977년도에 출간한 『해방신학』이란 책이다. …… 『해방신학』을 만난 건 나의 신앙생활에 한 획을 그은 일이었다. 감옥에서 나는 이 책을 아마 열 번도 더 정독했을 것이다. ……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대와 그들에 대한 충실성을 위한 교회 일부 성원들의 도전이었다. 해방신학의 영성은 전 세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퍼져 그들의 신앙과 사명감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8)
이 후 문정현은 1979년 7월 당국이 형집행정지를 취소해 다시 구속됐다가 10·26 후인 12월 8일 풀려난다. 박정희의 사망으로 독재정권이 종식됐다고 여겨졌으나 전두환 정권이 피의 학살과 함께 들어서며 다시금 암울한 시기가 시작됐다. 문정현은 이 시기 광주항쟁의 참상을 알리는 한편 1982년 일어난 오송회 사건이 조작됐음을 폭로하며 독재정권에 계속 저항하게 된다. 이 당시 문정현은 전북 장수군 장계성당에서 재직하며 농민운동을 시작했고, 익산(구 이리) 창인동성당에 재직할 때는 노동자운동에 나서게 된다.
'작은 자매의 집'
문 정현은 투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신지체아를 20여 년 넘게 돌보기도 했다. 정신지체아와의 첫 만남은 1986년 전북 장수군 장계성당에 있을 때 이뤄졌다. 당시 문정현은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목도하며 농민운동의 전면에 나서고 있을 때였다. 문정현이 바라본 농촌의 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어두워져서야 집에 돌아와 등목을 하고 보면, 일손에 도움이 안 되는 어린 자식이 배고파 엄마를 기다리다 마루에 잠들어 있다. 그 옆에 앉아 한숨을 쉬고는 살길을 찾기라기보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한탄을 한다. 그러다가 말 안 듣는 개구쟁이 아들이 눈치를 보며 마당 안에 들어오면 생벼락을 친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엄마도 똑같은 심정인데 자식을 나무라는 아빠에게 신경질을 낸다. 그것이 부부 싸움이 되어, 큰소리에 잠을 자던 자식까지 깬다. 험한 소리가 오고 가다가는 '내가 죽어야지' '죽을 테면 죽어' 하다가는 울적하여 그만 제초제를 마셔버린다. 쥐 죽은 듯이 있던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 소란해지면, 동네 사람들이 경운기에 실어 병원에 데려간다. 그러나 제초제를 먹고 살아남을 자 아무도 없다."9)
' 소값 파동'으로 피폐해진 그곳에서 문정현은 항의농성과 단식 등으로 농민의 현실을 알리고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자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시절 사람들은 그에게 '소몰이신부'란 별칭을 선사했다. 그렇게 농민운동에 몰두하던 때 문정현은 어느 날 충격적인 현실을 목도한다. 부모가 들일을 나가기 위해 한 아이를 마당의 감나무에 묶어놓은 것이었다. 그 아이는 정신지체아였다.
"개를 키우는 꼴이었어. 아이 옆에는 음식 그릇이 놓여 있고. 눈물이 왈칵 치솟더군. 이 아이를 그냥 두고 내가 무슨 신부며 농민운동가인가 싶었지."10)
문 정현은 곧바로 그 아이를 데려와 성당 옆 창고를 개조해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전북 익산시 월성동에 '작은 자매의 집'을 만들어 정신지체아, 장애아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이 하나둘씩 작은 자매의 집에 모여들었고, 게 중에 이름도 없이 오는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성을 따 기꺼이 아버지가 되어주었다. 거리를 돌며 끊임없이 투쟁의 현장에 있을 때도, 그는 꼭 이곳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보살폈다. 자신이 "평생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11)
'깡패신부'
그는 깡패신부라 불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부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일 때면 경찰들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욕설을 퍼붓고, 무전기나 모자 등을 닥치는 대로 강탈(?)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문정현은 자신이 시위 현장에서 과민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동아특위의 지학순 주교님의 민청학련 사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민주화와 정의구현사제단 활동. 전화 도청은 기본이고 24시간 사제관까지 감시를 당해야 했어. 어쩌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지. 오히려 감옥이 편안한 곳인지도 몰라.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은 없잖아. 누군가 나를 24시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살얼음판을 걷던 유신독재 시절이잖아. 술자리에서 민주의 '민'자, 통일의 '통'자, 미국의 '미'자만 들먹여도 보안사에 끌고 가 오뉴월 개 패듯이 패던 박정희 독재 시절이잖아. …… 그 당시는 돌파구가 없었어.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어. 경찰보다 한 수 위에서 행동하지 않으면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 경찰의 불알도 잡아야 했고, 때로는 주먹질도 했고, 장계성당에서 무전기를 빼앗아 화장실로 처넣었는데, 똥 푸는 차가 동원되기도 했지. …… 그래서 사람들이 과격하다고 말할 수 있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의 가족들 얼굴도 볼 수 없는데 어떡해. 농민들과 노동자들, 학생들과 시민들이 경찰에 붙들려 몰매를 맞고 있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잖아. 경찰이, 아니 유신독재 박정희가 그렇게 만들었지."12)
모든 길이 SOFA로 통하더라
문 정현이 '깡패신부'란 악명을 얻은 것은 박정희의 공도 컸지만 문정현이 항상 약자가 공권력에 의해 억압당할 때 그들과 함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독재정권이 사라진 뒤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군산 미군기지 앞에서,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매향리에서, 부안 방사성 폐기장 집회 현장에서, 대추리에서 그는 항상 선봉에 서 있었다. 특히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는 미군 문제, 한미 간의 불평등한 관계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 양상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70년대에는 주로 독재에 반대해서 인권운동, 19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 그러니까 농민·노동자운동을 많이 했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도 했지. 엄청나게 싸웠어. 이런 공식이지. 민주화 없이는 인권이 사각지대,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는 민주화도 사각지대, 의식이 이렇게 변하더라고. 인권운동에서 농민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그러다가 통일에 눈을 떴지. 그리고 1990년대부터는 미군과 미국과의 불평등한 한·미 관계 청산의 반미운동을 했다고 볼 수 있지."13)
그 가 통일운동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는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에서 죽은 조성만 열사 때문이었다. 전주 중앙성당에서 자신에게 영세를 받고, 전주해성중고등학교 종교감으로 있을 때 조성만을 가르친 바 있는 문정현은 조성만의 죽음을 보고 곧 통일운동에 나서게 된다.
"(조성만이) 유서에 미국놈 물러나라, 88올림픽은 남북 공동으로 개최되어야 한다, 그랬지. …… 나보다 성만이가 지금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니까. 당시는 내가 성만이 스승이었지만, 지금은 성만이가 나의 스승이지."14)
문 정현이 본격적으로 미군 문제와 한미 간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1997년의 일이었다. 1996년부터 군산 오룡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던 문정현은 당시 군산에서 활동하던 시민단체로부터 군산 미군기지에서 활주로 사용료를 인상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민항기가 군산 미 공군 기지 활주로를 사용하고 있었지. 우리 땅을 공짜로 내준 것도 억울한데, 공짜로 사용하는 그 땅의 활주로를 이용해 수익사업을 한다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잖아. IMF가 시작되어 국가 경제가 위태로운데 활주로 사용료를 2.5배 인상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 달러로 지급해야 하는 사용료를 환산하면 5배의 인상이었지."15)
곧 문정현은 시민단체와 함께 군산 미군기지 우리 땅 찾기 시민모임을 만들어 미군의 인상안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그 와중에 미군기지 문제와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가 국가기관 모든 곳에 진정을 해도 SOFA(한미주둔군자위협정)라 는 겁니다. 소음 피해, 공여지 문제, 미군 범죄 문제, 이런 것을 통해서 SOFA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게 전국적인 사안이고, 군산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서울에 올라와서 'SOFA개정국민행동'을 했는데요. 처음에 127개 단체에서 148개 단체로 늘어났죠. 그 와중에 매향리 폭격장 문제가 터지고, 전동록 씨 감전사고가 터지고, 효순이·미선이 일 터지고, 맥팔랜드 일 터지고 해서 소파 개정을 흉내 내는 자리까지 만들어놨는데, 소용이 없었죠. 그 다음에 불거진 것이 이라크 파병 문제, 미군 부대 이전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 올인을 하게 된 것이죠."16)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문 정현이 당시 인터뷰에서 올인을 했다고 밝힌 곳은 대추리였다. 그는 실제로 이 당시 대추리로 전입신고를 하고 그곳에서 거주하며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을 벌였다. 문정현은 대추리 싸움을 하며 분노했다. 자국민을 무시하는 정부의 처사에, 특권을 누리는 미국에 그는 분노했다.
"지난 9년 동안 몸으로 불평등을 느끼면서 미군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식 변화가 왔어. 그게 최근 들어서 대추리가 된 것이고. 시작부터 지켜보면서 어떻게 자국민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나? 생각이 들어. 이념을 떠나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작년에 대추리로 직접 들어와 살게 된 거지. 들어와 보니 그 불평등한 관계가 더 몸으로 와 닿아. 목적 달성을 위한 저들의 법 절차는 사람 관계가 아니야. 우리는 사람이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대접받아야 돼."17)
그 러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일부 언론에서는 문정현을 비롯한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벌이는 이들에게 '전문시위꾼' '소수 강경파'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성한표 『한겨레』 전 논설주간은 다음과 같이 일부 보수 언론을 비판했다.
" 신문들이 지역 주민은 괜찮은데 외부 불순 세력 개입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하고 법질서 회복을 강조하며, 군경의 피해만 부각시킨다. 미군기지 이전이 끝나면 현재 미군에 제공되고 있는 우리 땅이 7320만 평에서 2515만 평으로 줄어든다고 하니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반면에 평택은 349만 평을 추가로 공여함으로써 최대 군사기지로 바뀐다. 자기 마을이 미군기지로 바뀐다는 것을 좋아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기지 이전 결정은 당사자인 평택 주민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이뤄졌다. …… 언론이 평택의 시위대와 경찰, 군인의 충돌을 두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시위대를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할 일은 기지 이전과 관련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의제로 설정하고, 그 토론을 이끌어 사회적 공감대를 넓혀 나가는 일이다. 보수 신문들의 문제는 보수적인 논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도덕성에 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 지점까지 독자들을 끌어가고자 사실 외면이나 왜곡도 서슴지 않고 해치운다는 점이 그렇다."18)
평 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이전 문제는 결국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미군기지 이전을 합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대추리의 어느 주민은 "힘의 논리와 시간적 압박에 못 이겨 이뤄진 이주 합의여서 안타깝고 억울하다"고 말했고 문정현은 "폭력으로 시작한 미군기지 이전 작업은 마을 주민은 물론 국민 모두에게 좌절과 분노만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19)
성직자의 삶은 현재형
문정현은 거리로 나선 이후 항상 종교인이 왜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느냐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종교인이면 종교에만 관심을 갖지, 왜 현실정치에 참여하느냐는 얘기다. 이에 대해 문정현은 '사회 속의 교회'란 말을 들려준다.
" 성서는 가난하고,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는, 소리를 내도 소리가 나지 않는 그게 성서의 시작부터 끝까지입니다. 공회라는 것은 이 사회의 고통은 바로 교회의 고통이요, 기쁨 또한 교회의 기쁨이다, 그러니까 사회 속의 교회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약자의 편에 들고, 불의에 항거하고 하는 그것을 원형이 되도록 살아준 분이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의 수난사를 자세히 보면 바로 순교의 길입니다."20)
또 문정현은 신앙인의 삶은 지금 실천에 옮기는 현재형이란 말도 들려준다.
" 삶은 현재형이야. 과거도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 또한 다가올 현재지. 특히 신앙인의 삶은 지금 실천에 옮기는 현재형이야. …… 물론 유신독재에 비하면 참으로 민주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그러나 여전히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이 존재하잖아.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은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조직운동이지. 예수님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것이잖겠어. 왜, 정치에 참여하냐고. 우리의 스승이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았나. 가난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와 국가의 구조와 제도를 바꾸어야지. …… 이 땅의 하늘나라는 정치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 아니겠어."21)
옳은 말이다. 종교인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면서도 서두에 인용한 『경향신문』의 사설에서 밝힌 것처럼 "성조기를 흔들며 북녘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천문학적 액수의 교회 재산을 대대손손 물려주며, 교회를 특정 정당 대선후보의 선거대책본부로 여기는 듯한 언동 등"을 일삼는 종교인들에게 문정현의 이 말을 꼭 들려주고 싶기까지 하다.
문정현 신부는 '작은 자매의 집' 원장직을 은퇴한 이후 군산에 터를 잡고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지금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자, 도시빈민, 장애인들"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22)
길 위의 신부, 문정현. 그의 삶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최 을 영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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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12 직후부터 사찰 강화/ 보안사 민간인 사찰 디스켓 내용 분석」, 『한국일보』, 1990년 10월 7일, 14면.
2) 「신부님, 문정현 신부님」, 『경향신문』, 2008년 1월 28일, 31면.
3) 채은하․여정민, 「“우리 이제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프레시안』, 2008년 2월 7일.
4) 문정현․최종수 대담, 「우리 시대의 경계인 문정현 신부: 길 위에서 죽음을」, 『문학과경계』, 2004년 겨울호, 56~57쪽.
5) 문정현, 「“한국 가톨릭은 거듭나야 한다”」, 월간 『말』, 1991년 4월호, 147~148쪽.
6) 장세환, 「문정현: 소외층과 함께하는 ‘우리들의 신부’」, 『한겨레』, 1992년 12월 2일, 20면.
7) 김민수, 「문정현 신부가 꿈꾸는 세상」, 『경향잡지』, 2000년 8월호, 116쪽.
8) 문정현, 「빵과 자유와 영성의 신학」, 월간 『말』, 1998년 4월호, 148~149쪽.
9) 문정현, 「하느님은 인간의 꽃」, 『경향잡지』, 1986년 9월호, 86~87쪽.
10) 김민수, 「문정현 신부가 꿈꾸는 세상」, 『경향잡지』, 2000년 8월호, 118쪽.
11) 김민수, 「문정현 신부가 꿈꾸는 세상」, 『경향잡지』, 2000년 8월호, 118쪽.
12) 문정현․최종수 대담, 「우리 시대의 경계인 문정현 신부: 길 위에서 죽음을」, 『문학과경계』, 2004년 겨울호, 55~56쪽.
13) 문정현․최종수 대담, 「우리 시대의 경계인 문정현 신부: 길 위에서 죽음을」, 『문학과경계』, 2004년 겨울호, 59쪽.
14) 문정현․최종수 대담, 「우리 시대의 경계인 문정현 신부: 길 위에서 죽음을」, 『문학과경계』, 2004년 겨울호, 59쪽.
15) 문정현․최종수 대담, 「우리 시대의 경계인 문정현 신부: 길 위에서 죽음을」, 『문학과경계』, 2004년 겨울호, 61쪽.
16) 지승호, 「인터뷰: 문정현 신부- 미국을 위한 성지, 대추리」, 월간 『인물과사상』, 2006년 10월호, 27~28쪽.
17) 조용진, 「진리를 따르는 거리의 신부」, 『초등우리교육』, 2006년 11월호, 23쪽.
18) 성한표, 「미디어전망대: 신문들의 반시위대 캠페인」, 『한겨레』, 2006년 6월 11일, 19면.
19) 김기성, 「이주 합의 대추리 주민 ‘고향에서 마지막 설’」, 『한겨레』, 2007년 2월 15일, 12면.
20) 지승호, 「인터뷰: 문정현 신부-미국을 위한 성지, 대추리」, 월간 『인물과사상』, 2006년 10월호, 36쪽.
21) 문정현․최종수 대담, 「우리시대의 경계인 문정현 신부: 길 위에서 죽음을」, 『문학과 경계』, 2004년 겨울호, 60~61쪽.
22) 채은하․여정민, 「“우리 이제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프레시안』, 2008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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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7/01 00:05 | 낙서장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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